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국민당/역사 (문단 편집) == 국민정부 == [[장제스]]의 주도로 북벌이 성공을 거두면서, 국민당의 주도로 '국민정부'(國民政府)가 수립되었다. 1928년 [[편견회의]]가 열려 수백만에 달하는 군벌군을 감축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반발한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[[반장전쟁]]이 발생했다. 1929년 2월 [[리쭝런]]이 [[1차 장계전쟁]]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고 5월 [[펑위샹]]이 [[1차 장풍전쟁]]을 일으켰지만 역시 진압당했다. 9월에는 장파쿠이가 반란을 일으켰고 10월에 옌시산의 부추김을 받은 펑위샹이 [[2차 장풍전쟁]]을 일으켰지만 또 진압당했다. 장파쿠이는 광서로 남하하면서 장파쿠이의 반란은 [[2차 장계전쟁]]으로 번졌고 12월 [[탕성즈]]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[[장당전쟁]]이 벌어졌지만 또 진압당했다. 1930년에는 [[옌시산]]이 모든 반장 군벌들과 왕징웨이의 개조파, [[서산회의파]]까지 규합하여 [[중원대전]]을 일으켰지만 장제스는 [[장쉐량]]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모두 분쇄하고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. 이어 1931년 2월 [[후한민]]과의 충돌로 장제스가 후한민을 감금하는 [[탕산 사건]]이 발생하여 분노한 광동파, 광서파, 개조파가 힘을 합쳐 [[1차 양광사변]]을 일으키지만 [[만주사변]]의 발생으로 장제스 하야를 조건으로 통합했다. 이후 [[쑨커]]가 국민당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답이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한달 만에 하야함으로 1932년 [[장제스]]가 복귀하여 군사위원장에 취임했고 [[왕징웨이]]가 행정원장에 취임함[* 1933년 열하사변으로 외교부장 나문간이 사퇴하면서 외교부장도 겸임했다.]으로 [[장왕합작]] 체제가 열렸다. 이후로도 일본의 침입은 계속되어 1932년 [[제1차 상하이 사변]]이 발생했으며 1933년에는 [[열하사변]]으로 열하성이 침탈되었다. 장제스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허약한 국제연맹은 도움은 쥐뿔도 주지 못했고 장제스는 이를 갈면서 후일을 도모해야만 했다. 일본은 [[만주국]] 건국을 선포하였고 이에 항일 분위기가 끓어올랐으나 장제스는 국가 내부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켜 군사력을 확충한 다음에 일본에 맞섰다는 전략을 세우고 경제개발과 국방건설에 나섰다. 이 시기 [[중화민국]]은 [[독일]]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, [[국민혁명군]]은 독일의 군사고문단의 지원과 함께 상당수의 독일제, [[체코]]제 무기를 도입 무장하였다. 1929년에는 경제 대공황과 황하 대홍수를 비롯한 초대형 자연재해가 발생하면서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으나 합작사 운동, 상품작물 보급, 농협 설립, 감조정책 등을 통해 농촌 부흥이 시도되었고 도로 및 철도 건설, 공업화 정책도 시행되었으며 기술 혁신이 이루어져 비행기, 기차, 장갑차 등의 시험적인 생산이 이루어질 정도였다. 1935년에는 [[법폐개혁]]으로 화폐가 통일되어 재정 안정성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. 1936년 중화민국 농업 생산량은 건국 이래 최대 수치를 기록했고 전 세계가 입을 모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칭찬했다. 이 때문에 1927년부터 1937년까지를 황금 10년이라고도 부른다. 한편 분쇄된 줄 알았던 [[중국 공산당]]은 중국 각지에 숨어들어서 해방구를 건설하고 국민정부를 상대로 한 유격전을 전개했다. 제일 규모가 큰 것이 [[정강산 투쟁]]으로 시작하여 루이진으로 근거지를 이동한 후 건설된 마오쩌둥의 강서성 중앙 소비에트였다. 장제스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[[초공작전]]을 실시했으나 잇달아 패했고 3차 초공작전은 [[만주사변]] 때문에, [[제4차 초공작전]]은 [[열하사변]] 때문에 중단되었다. 하지만 장제스는 포기하지 않고 1933년 [[한스 폰 젝트]] 장군의 조언을 얻어 [[제5차 초공작전]]을 실시, [[중화소비에트공화국]]을 멸망시켰다. 공산당은 [[대장정]]의 길에 올라 섬서성 연안까지 도주했고 이를 소탕하기 위한 6차 초공작전이 준비되고 있었다. 이 와중에 1933년 복건에서 [[복건사변]]이, 1936년 광동과 광서에서 [[2차 양광사변]]이 일어나 반장파들의 최후의 저항이 있었으나 모두 박살났다. 그런데 만주사변과 열하사변 이후 영토를 모두 잃고 낭인 신세로 전락한 [[장쉐량]]이 장제스를 감금하고 [[국공합작]]을 요구하는 [[서안 사건]]이 발생했다. 장제스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완강히 저항했으나 [[저우언라이]]와 [[쑹메이링]]의 중재로 결국 공산당과 휴전을 맺는데 합의하게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